s-701
| 굶주린 불구자. |
s-702
| 영양 실조로 얼굴이 창백한 고아들이 몰려들었다. |
s-703
| 인민 위원회 레닌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사형 폐지를 포고하였다. |
s-704
| 볼셰비키는 적을 죽이기를 거부한 것이다. |
s-705
| 소비에트 정권을 타도하고자 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한 크라스노프 장군은 적위군에게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. |
s-706
| 내전이 연출한 사태의 엄혹함이 있었다. |
s-707
| 신나는 혁명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그것으로 무슨 일을 하였던가? |
s-708
| 볼셰비키 당에 의해 지도되었던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획득하자마자 신속하고도 대담하게 중세의 유물을 일소해 버렸다. |
s-709
| 그들은 토지에 관한 포고를 내려 수백 년 지속되어 온 토지 소유에서의 농노제의 유물을 뿌리채 뽑아 버렸다. |
s-710
| 신분상의 구분이나 호칭은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러시아 공화국 시민이라는 국민 전체에 공통되는 호칭이 정해졌다. |
s-711
| 소비에트 권력은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. |
s-712
| 교회는 국가에서, 학교는 교회에서 분리되었다. |
s-713
| 여성은 사회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했다. |
s-714
| 이어 10 월 혁명은 러시아인 이외의 각 민족에 대한 억압과 불평등을 마감했다. |
s-715
| 러시아에 있는 모든 민족의 자유로운 발전과 완전한 동등권이 법적으로 확립되었다. |
s-716
| 분리하여 독립 국가를 창설하는 것까지도 포함한 자결권이 모든 민족에게 보장되었다. |
s-717
| 1917 년 12 월,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와 핀란드의 국가적 독립을 승인했다. |
s-718
| 당과 소비에트 권력은 인민의 가장 절실한 경제적 필요와 문화적 요구를 만족시켰다. |
s-719
| 자본가와 지주를 수탈함으로써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조건을 즉각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했다. |
s-720
| 궁색한 가건물에서 비로소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소유물이었던 좋은 집들로 이주했다. |
s-721
| 노동자, 농민과 그 아이들은 완전히 자유롭게 교육받을 수 있게 되었다. |
s-722
| 학교 교육과 의료는 무료로 되었다. |
s-723
| 차르와 부호의 대저택은 인민의 재산으로 되어 인민의 집회 장소나 결핵 요양소, 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. |
s-724
| 노동자의 노동 조건이나 노동 보호도 개선되어 8 시간 노동제가 실시되었다. |
s-725
| 볼셰비키 당은 권력을 쟁취하자마자 혁명적 신속성과 열정으로 농민의 가장 절실한 경제적 요구를 실현했다. |
s-726
| 농민은 무상으로 지주의 토지를 분배받았고 지주, 자본가의 억압에서 해방되었다. |
s-727
| 이러한 활동에서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. |
s-728
| 즉 중세의 잔재들을 파괴하여 그것들을 완전히 일소하며 러시아에서 이러한 야만 상태와 치욕적인 상태를 청소해 내는 것이다. |
s-729
| 봉건제적인 것이 제거되는 것을 뜻한다. |
s-730
| 치졸한 햄릿들은 그들의 목검을 휘둘러 댔지만 군주제 하나도 무너뜨리지 못하였다. |
s-731
| 영국이 250 년 동안 진행시켜 온 것. |
s-732
| 소비에트 권력은 국립 은행과 개인 은행을 국유화하고 은행 기업은 독점한다고 성명했다. |
s-733
| 11 월 말 소비에트 권력은 자본주의적 대공업을 국유화했다. |
s-734
| 모든 자본주의적 관계는 근본적으로 파괴되었다. |
s-735
| 1918 년 봄에는 석탄, 야금, 석유, 화학, 기계, 제조, 섬유 부문의 자본주의적 대기업의 대부분과 제당업 분야의 모든 기업이 국유화되었다. |
s-736
| 수송, 체신, 외국 무역도 국유화되었다. |
s-737
| 철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 들었으며 그 혼란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. |
s-738
| 기차는 정지하게 될 것이다. |
s-739
| 공장으로 향하는 원자재와 석탄의 운송이 정지되게 될 것이다. |
s-740
| 곡물의 운송도 중단될 것이다. |
s-741
| 1917 년 러시아 경제가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해야 할 발전 단계에 이르렀던가? |
s-742
| 나아가 부르주아지의 사유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한 마당에 이런 사회를 사회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사회주의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? |
s-743
| 그러나 역사에 대한 초보적인 교양만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우리의 의혹도 정당한 것임을 수긍할 것이다. |
s-744
| 그 사회도 사회주의 사회요. |
s-745
| 계급적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라고 부르는 데 대해 우리는 긍정하오. |
s-746
| 어떻게 해서 두 가지 상이한 역사 발전 단계가 동시에 진행될 수 있는가. |
s-747
|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. |
s-748
| 진실은 중간에 있지 않고 그 어느 한 편에 있으며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을 통해서만 진실과 오류는 판별될 수 있다. |
s-749
|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편이 논쟁의 승자가 되더라도 승자는 패자의 주장에 포함된 긍정점을 껴안아야만이 스스로의 결함을 보완하게 된다는 점이다. |
s-750
| 역사는 똑같은 연극을 반복하지 않는다. |
s-751
| 왜냐하면 재연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이미 대단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. |
s-752
| 멘셰비키의 주장을 끝까지 따라가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봉건제와 타협하는 부르주아지의 하수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착된다. |
s-753
| 이러한 양상은 1917 년 2 월에서 9 월까지 혁명 진행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. |
s-754
| 코르닐로프의 전신을 두적시키고 군대의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기차의 증기를 빼 버린 것은 혁명적 노동자들이었다. |
s-755
| 부르주아 민주주의 철저한 완수라는 임무가 누구에게 요청되고 있었던가는 명확하였다. |
s-756
| 그리고 볼셰비키 당은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대담하게 권력을 장악하였다. |
s-757
| 그런데 이렇게 수립된 볼셰비키의 권력 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이 과연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교두보였던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정적이다. |
s-758
|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. |
s-759
| 유럽은 혁명을 잉태하고 있다. |
s-760
| 그는 제국주의 전쟁이 전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촉발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던 것이 분명하다. |
s-761
| 러시아 10 월 혁명이 발발한 지 꼭 1 년 만에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났다. |
s-762
| 1918년 11월 독일과 중부 유럽은 대격변의 도가니로 빠져 들었다. |
s-763
| 베를린, 빈, 바르샤바에 노동자 소비에트가 등장하였다. |
s-764
| 베를린의 거리 거리에 바리케이드가 쳐진 1919 년 1 월 트로츠키는 환호하였다. |
s-765
| 혁명이 시작되어 모든 나라에서 세력을 얻고 있습니다. |
s-766
| 전쟁의 현 국면에서 독일 제국주의가 승리하는 경우 이러한 붕괴는 단지 늦추어질 수 있을 뿐이다. |
s-767
| 그런데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지금까지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. |
s-768
| 여기서 볼셰비키의 자본주의에 대한 파악이 매우 피상적이지 않았는지를 묻게 된다. |
s-769
| 레닌과 트로츠키로부터 70여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있는 우리들은 격동의 역사 무대를 좀더 냉정하게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있다. |
s-770
| 그리고 그들이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의 역사까지를 총괄하여 당시의 사채를 파악할 수 있는 우리는 이렇게 단언한다. |
s-771
| 이러한 과정에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독재와 국유화 조치는 불가피하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하다. |
s-772
| 사회주의적인 성격의 조치들이 요구되었다. |
s-773
| 그러나 이 사회주의적 조치들이 한 나라의 역사발전 단계를 껑충 뛰어넘게 해 주는 것은 아님을 냉정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. |
s-774
| 레닌은 이상과 현실 사이를 자주 왕복한 흔적들을 많이 남겨 놓았다. |
s-775
| 그러나 그런 식의 논의는 올바르지 않다. |
s-776
| 사본주의는 사회주의에 비해서는 악이다. |
s-777
| 그러나 식의 논의는 올바르지 않다. |
s-778
| 사회주의에 비해서는 악이다. |
s-779
| 그러나 자본주의는 봉건제 소생산 그리고 소생산자들의 분산성에 기인하는 관료주의의 온갖 해악들에 비해서는 선이다. |
s-780
| 우리는 아직 소생산으로부터 사회주의로 직접 이행할 힘이 없기 때문에 소생산과 일정 정도의 자본주의는 피할 수 없다. |
s-781
| 어느 정도였던가? |
s-782
| 레닌은 이렇게 설명한다. |
s-783
| 볼로그다의 북쪽 로스토프 돈과 사라토프의 남동쪽, 오렌부르크와 옴스크의 남쪽, 그리고 톰스크의 북쪽에는 많은 넓은 문명국들이 들어설 수 있는 광활한 토지가 있다. |
s-784
|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. |
s-785
| 그러나 앙가라는 1930 년대 초기의 기근을 겪지는 않고 있었다. |
s-786
| 그냥 강에다 모자를 집어 넣어 떠올리기만 해도 고기가 잡힐 정도였다. |
s-787
| 들에서는 딸기류와 버섯류를 얻을 수 있었다. |
s-788
| 레닌은 자신이 제창한 사회주의 혁명론과 러시아의 낙후한 현실이 빚는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 자본주의의 강화와 이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인도를 제창하였다. |
s-789
| 이는 볼셰비즘과 멘셰비즘의 전통적 논쟁에서 멘셰비즘의 문제 제기를 나름의 이론 속에서 흡수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. |
s-790
|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러시아는 사회주의 문턱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봉건제의 터널에서 막 빠져 나온 지점에 있었다. |
s-791
| 레닌은 러시아의 역사 발전의 지점을 심하게 왜곡하였다는 비난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. |
s-792
| 그러나 정치와 경제의 불일치는 매우 비극적이었다. |
s-793
| 과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하는 물음 앞에 우리는 부정적이다. |
s-794
| 이 취약함은 제헌 의회의 해산에서 처음으로 표출되었다. |
s-795
| 그만큼 국민 가운데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중이 작았으며, 그만큼 볼셰비키 당의 농민에 대한 영향력이 제한적이었음을 입증한다. |
s-796
| 제헌 의회는 볼셰비키의 정책을 거부하였다. |
s-797
| 그리고 볼셰비키 당은 제헌 의회를 해체시켜 버렸는데, 이 해체 조치의 정당성을 가리기에 앞서 그만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이 협애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. |
s-798
| 그리고 이 협애함은 기본적으로 경제의 낙후함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지 않았던가? |
s-799
| 상식적으로 일당 독재는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가 없다. |
s-800
| 자신을 비판하는 정당이 없는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당 내의 민주주의조차도 소멸하게 된다. |