s-503
| 후일 농민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개혁운동도 당시의 정신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데 중요한 매개자 역할을 담당했던 활판인쇄술의 고마움을 빼놓을 수 없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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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러한 모든 것은 르네상스시대에 일어난 일련의 변혁운동으로 중세뿐 아니라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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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'영주 대 농민' 이란 봉건적 사회구조 이외엔 그 무엇도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, 정신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에 얽매어 있었다. |
s-506
| 도시가 형성되고 시민계급이 등장할 때 영주들은 점점 몰락하기 시작했고, 이와는 반대로 농민들의 지위가 상승하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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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 때 형성된 신흥계급이 낡은 사상과 문화에 반발, 독자적 사상과 문화를 개척하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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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러한 교회의 부패와 권위주의에 대한, 자아의식이 싹트며 일어난 학문과 예술의 부흥운동, 즉 르네상스는 유럽근대사의 시작을 알린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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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당시 유럽시민들은 현실에 충실을 기한다는 정신으로 충만되어 있었고, 또 교회와 신앙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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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 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확립을 보지 못한 혼란이 계속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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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리고 자연과학의 성과도 확립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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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높이 평가되었고, 또 신앙에 있어서도 불합리한 도그마는 하나하나 파괴되어가고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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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상인들이 유럽문화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크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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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중세 유럽의 문화란 그리 보잘것없는 것이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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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당시 유럽문화는 아라비아나 비잔틴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을 뿐 아니라, 도덕적으로도 타락해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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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중세 유럽의 십자군은 문명세계를 약탈 정복하는 야만적 행위를 일삼았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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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들의 약탈행위는 소아시아, 이집트, 스페인까지 미쳤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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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들 약탈자들은 당시 진보된 문화를 갖고 있던 아라비아에서는 재물뿐 아니라, 학문, 예술, 사상, 기술, 심지어는 상술 배워갔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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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런 제반요인들이 요인들이 유럽 사회의 발전을 가져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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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 때 이탈리아의 군주들도 과거 '봉건군주' 의 틀을 벗어나, '상인군주' 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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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들은 종래 무력에만 의존해오던 통치방법에서탈피해 탈피해 이교, 사법, 전쟁,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합리적이고 타산적인 사고에 따라 진행시켰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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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러나 교육 및 문화사업에 이들 군주들이 많은 공헌을 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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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르네상스가 바로 이러한 문예보호자들의 손에 의해 개화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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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오늘날 이러한 기이한 문화 발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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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와 유사한 현상은 오늘날 우리들의 주변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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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러나 모든 역사가 그렇듯, 르네상스시대 상인군주들의 문예애호사상이나 교육사업에의 참여는 후일 유럽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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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오늘날 유럽경제 발전의 모델로 되고 있는 '산학협동' 의 근본정신도 바로 이러한 르네상스에서 그 뿌리를 찾아 볼 수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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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인문주의가 막 고개를 들기 시작한 근대학문의 세계는 종교개혁과 함께 출판문화에 새로운 면모를 가져오게 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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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들은 그리스와 로마인의 문학작품들의 출간과 해석에 동참하고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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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와 동시에 르네상스 스타일의 새로운 형식의 장정을 위한 교육이 장려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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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알프스 이북지역의 지도적 인문주의자는 에라스무스이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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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는 1511년 파리에서 백치의찬가를 출간, 27판까지 거듭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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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는 저자에게 있어 세계적 명성을 떨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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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당시 출판업자들은 라틴어를 상용하고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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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출판인들은 인문주의를 이해하는 높은 교양을 겸한 학자들이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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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리고 교정원까지도 대부분 학자들이었으므로 인쇄소는 곧 그 지방문화의 산실이자 지식인들의 광장 역할을 담당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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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알두스마누티우스는 베네치아의 저명한 인쇄업자로 그의 인쇄소는 그리스 고전학자들의 집합장소이기도 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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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곳에서는 세계적으로 열망하는 모든 분야의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이탤릭체의 문고판으로 찍어냈고, 이를 통해 이탤릭체의 보급 확산을 보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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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스위스의 바셀에 있는 요한프로벤도 유명한 출판업자였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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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는 독일 하멜부르크 출생으로 바셀대학을 졸업한 석학이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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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는 유명한 출판업계의 선배요 파리대학 학위를 갖고 있는 요한아메르바흐, 요한페트리와 동업해 신학 및 법률 서적을 출판하기 시작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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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예외 없이 이 출판사에도 젊은 인문주의자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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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영국에서도 이미 캑스던 같은 출판업자들에 의해 출판이 시작되었는데 기술은 당시의 이태리보다도 뒤져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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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에라스무스는 그가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 곳에서 그의 저서를 출간하지 않았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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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 이유는 영국의 출판기술이 떨어져 그의 마음에 드는 책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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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는 언제나 활자의 크기, 판형 등에 관심을 갖고 또 책은 겉치레보다는 읽기 쉽고 가지고 다니기 편리한 책을 선호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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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오늘의 책자와 같이 소형의 책을 처음 제작한 것도 알두스마느티우스이고, 에라스누스도 그런 이유로 그와 손을 잡고 출판활동에 정력을 쏟았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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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후일 에라스무스의 책은 대부분 바셀에 있는 그의 친구 요한 프로벤이 출판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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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는 그 곳에서 여러 해 동안 머무르기도 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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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서적 출판에 명성을 떨치는 인쇄업자였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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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프로벤은 굴지의 학자들과 휼륭한 작업을 했으며 그 결과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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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러한 상황속에서 특별히 바셀에서는 인문주의와 새로운 학문에 관해 인식이 높았고 이러한 상황하에서 대량출판이 가능하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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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바셀에서는 16 세기의 전 기간에 걸쳐 출판업의 개화를 보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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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6 세기 중반 이후 고전작들을 위한 인문주의출판의 즐거움은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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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라틴어가 17세기 말까지 엄격한 학문의 주언어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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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6 세기 초 독일에서 시발, 급속도로 전유럽에 유럽에 파장을 일으킨 이 개혁운동은 북방 인문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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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인구의 대부분이 농민층에 속해있던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종교 개혁은 중세교회의 권위를 배격하고 인간의 존엄을 요구하는 일종의 농민해방운동으로 번져나갔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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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는 교황의 세속화에 따라 교회의 타락상이 극심해지며 종교와 성직자들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진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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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당시 교회의 부패를 증오하던 민중들 사이엔 종교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는 정신적 토대가 이미 자리잡혀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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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런 바탕위에서 1517년 마르틴루터에 의해 점화된 종교개혁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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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즉, 면죄부판매의 부당성을 항의하고자 발표한 '95 개조의 반박문' 이 당시 민중들의 호응을 받아 개혁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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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 95 개조의 반박문은 처음엔 라틴어로 씌여졌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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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래서 라틴어를 모르던 당시의 민중들에겐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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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러나 이는 곧 독일어로 번역, 배포되며 불과 수주 내에 독일은 물론, 국경을 넘어 전 유럽에 파급되는 효과를 보았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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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 때 이미 각국에서는 유럽의 공용어 라틴어의 독점에서 벗어나 각 국어로 출판이 시작되고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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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당시 독일의 출판계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으로 엄청난 출판물을 생산해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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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즉, 대량의 플룩슈리프트을 염가로 제작, 호기심이 많은 민중들에게 배포했고, 이들은 이 팸플릿을 다시금 돌려보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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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 때 라틴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상태였고, 시민들은 당대의 문학작품들도 독일어판으로 접할 수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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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리고 루터의 독어판 성경도 급속히 파급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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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당시 루터 자신이 강력히 반발을 했듯이, 자신의 저서에 관한 무단 복제행위가 성행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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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러한 출판의 양적 확대에 반해 기술적 예술적 질은 점점 떨어져갔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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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플룩슈리프트는 당시 정신적 정치적 집단에 중요한 언로를 담당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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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농민봉기의 지도자 토마스뮌처도 민중들에게 그의 요구를 설교뿐 아니라, 신문을 통해 전달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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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당시 부패한 귀족 사회와 교회의 비리를 파헤치는 데 있어, 신문과 서적들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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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특별히 이는 산발적으로 일어난 농민봉기를 공동프로그램을 통해 일치된 행동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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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 때 민중선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플룩슈리프트였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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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러나 플룩슈리프트는 점성가나 야바위꾼들에 의해 악용되기도 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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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 새로운 신문은 낱장 형식이나 묶음으로 되어 정치뉴스나 자연발생적인 사건 및 여타의 소식들을 전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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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리고 때로는 경이할 만큼 놀라운 소식도 전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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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민중서적은 소형에 저렴한 가격으로 흥미거리 책들을 발행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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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한스삭스는 그의 약 6천 개의 소극과 시 등을 엮어내 루터 다음가는 작가로 꼽혔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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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영주와 성직자들에 대한 비방문 등은 관에 의해 검열과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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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에 대한 희생자는 수많은 인쇄업자와 상인들이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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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들은 이러한 불온문서를 배포했기 때문에 1527년 뉘른베르크의 인쇄업자 한스헤르고트는 지방영주의 명에 의해 라이프찌히에서 처형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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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가 한 혁명적인 내용이 담긴 플룩슈리프트를 대량 인쇄 배포했기 때문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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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'플룩슈리프트' 는 오늘날 '잡지' 의 효시가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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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미 14 세기 초 유럽에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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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영국, 프랑스, 스페인 등 나라에서는 왕권이 강화되고 교황은 아비뇽에서 유폐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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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즉, 르네상스의 시대가 막을 열었던 것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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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즉, 중세 말에서 근세 초에 해당되는 시기로 인간 중심의 새로운 가치관 창조, 학문예술 등 전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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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렇듯 르네상스가 신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 중심으로 전환하게 된 데는 대략 두 가지 요소를 들 수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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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하나는, 15 세기 이래 계속된 지리상의 발견이고, 다음으로는 새로운 인쇄술의 등장을 들 수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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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특히 당시 상인들은 단순한 의미의 상인이 아니라 가위 '만능의 지배자' 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과 기술을 겸비하고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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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들이 당시 유럽중심의 협소한 정신세계와 제한된 세계관을 넓혀주었고, 또 학교를 세우는 등 문화사업에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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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러한 전환기의 와중에서 정신문화의 일대 전환이 빠른 시일 내에 가능했던 것은 신기술의 발명으로 인한 출판물의 대량복제와 염가판매 등을 들 수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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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러한 것이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고 또 인문주의의 토론을 더욱 활발히 추진시켰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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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특히 당시의 출판업자들은 대학인이자 출판업자였고, 인문주의를 이해하는 문화인이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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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인문주의자들의 비원인 신구 양교의 재통합도, 유럽은 언어와 종교면에서 꼭 같아야 한다는 숙원도 이루어지지 못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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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해 일어선 농민봉기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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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자들이 활발히 출판에 참여, 출판문화 발전에 기여한 사실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. |
s-601
| 특히 에라스무스가 출판에 보인 애정은 출판문화사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. |
s-602
|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해 다양하게 나타난 출판활동과 이를 통한 언론자유의 시발은 근세를 여는 데 큰 공헌을 했다. |