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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옛날의 서울의 모습이 몹시 그립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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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른 아침과 밤 늦게 종로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고 잠을 자고 잠에서 깨어나던 그 때 그 서울이 그립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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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서울에는 다리도 많았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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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 오간수다리에는 쇠창살이 설치되어있어서 장마 때 빗물에 떠내려간 것은 오간수다리에 걸려 있어서 임자가 찾아가곤 했지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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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본래 한양 근처는 처녀림 밀림지대였으므로 목재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기와가 없어 기와는 송도에서 구워서 한양으로 운반하기로 하였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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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어쨌든 경북궁을 짓고 성을 쌓고 성 주위에는 문을 여덟 개나 세웠지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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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때는 서울 장안에 소음이 없어서 보신각에서 아침 저녁으로 울려 나오는 종소리가 어디서나 다 들렸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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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 절을 짓고 나서 흥화문 대궐문을 헐어다가 박문사 정문으로 세웠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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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흥화문이라는 현판은 어디로인지 간 곳이 없어지고 삼문 한가운데 문 위에는 박문사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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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나는 특히 장손이기 때문에 우리 조부께서 성묘 때 아들을 잘 데리고 가질 않아도 예닐곱 살 먹은 저를 꼭 데리고 갔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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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 마장이란 곳은 미나리 밭이 많았고 그 옆으로는 청계천 하류가 있었어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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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아주 잘 꾸며 놨었지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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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아마 땅이 좋았던 모양이지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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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다 볶으면 바가지에 담아서 온 식구가 둘러 앉아서 씹어 먹는데, 아작아작 씹어 먹지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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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왜놈들을 잡아 먹는 겁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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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먹을 때 다 먹지 않고 반쯤 남기지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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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하며 소리치지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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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와 같이 콩을 볶고 나서는 잡아 먹고, 그것으로 부족하니까 파묻고 밟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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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즉 부산 동래부를 거쳐서 언양으로, 울산으로 경주로 해서는 문경새재를 넘었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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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 살곶이다리는 그 당시 남쪽으로 통하는 제일 큰 다리였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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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 다리를 건너서 증포리, 사근리, 왕십리, 마장리로 쳐들어왔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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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하여튼 왜놈들이 이곳에 와서 진을 쳤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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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처음에는 귀를 소금에 절이다가 결국은 코를 소금에 절여 가지고 갔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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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너무 착하다보니 말입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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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소금에 절인 코를 가져간 왜놈들은 코 하나에 사람 하나, 대가리 하나다 하고 전공을 세었겠지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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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것이 경도에 있는 풍국신사인데, 그 입구에 큰 대갓집 행랑채처럼 돼있는 그곳에 코를 묻었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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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우리는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입었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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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옛 서울의 아름답던 기와집들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초가집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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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한인은 성냥, 연필, 공책, 비누 같은 일용품도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토지를 빼앗아 간도로 밀려나가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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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언더우드 목사는 서울에 와서 미국 공관 곁의 정동에 자리를 잡았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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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서대문 안의 본래의 정능 자리에는 후에 영국 대사관이 세워졌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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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정동이 한국의 신문화 신교육의 발상지가 된 내력을 말했으니, 이제는 서양식 신교육이 본격적으로 전래하던 시초를 말해야겠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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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마침내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오는 길에 일본에서 감리교의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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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는 영어를 가르친 뒤에 정동에 고아원을 창설하고 이어서 주간학교를 개설하였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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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초기의 학생은 송순명, 안창석, 김유순, 김규식 등이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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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김규식 선생도 그런 고아의 한 예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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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도산 안창호 선생은 고아는 아니지만 그 학당의 출신으로 그 학당의 선생이 된 분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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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정신여학교의 내력은 이러하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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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어느날 고학당에 새로운 사례가 생겼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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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는 원두우 학당의 주일 학교를 지도하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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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는 여러 대학에서 많이 공부하고 외교관 자격까지 획득한 유식하고 유능한 인물이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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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러던 중 배위량은 선교회에서 평양지부로 이임시켜서 마펫 목사를 도와 그의 소신을 펴서 숭실학당을 설립하고 다년간 학당장을 역임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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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제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가 연동 선교사 언덕에 자리를 잡게 된 연유를 이야기해야겠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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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리하여 게일 목사에 의하여 남녀 두 학교가 연못골에서 밀러 학교의 맥을 이어 다시 일어난 것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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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화동 충신동 효제동에는 오래도록 배추밭이 많았고, 연지동은 남북으로 깊게 뻗힌 산언덕이 그 중심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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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대체로 사람들이 욕심 내지 않는 값싼 땅이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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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다만 그 중 이승만은 배재 출신이므로 감리교회 선교사에게 보내서 세례를 받게 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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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서울 선교사들은 밀의두가 앞으로 이상적 교장이 되리라고 기대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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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때 연동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심스럽게 가운데에 휘장을 치고 여학생들도 오른편에서 예배하는 법을 창안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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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밀의두 교장은 경신학생들을 이끌고 배재학당으로 갔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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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교기를 제정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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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서양법학 인명에만 국한되어 동양법학 인명사전은 다른 과제로 남겨 두고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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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학생들은 교과서를 읽으면서 공부하다가 부딛치는 수많은 법학인물들을 이 사전을 통하여 보다 가까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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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저자의 원숙한 법학자로서의 해박한 지식으로 본서는 법학입문서로서의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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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 책으로 한국의 법학교육에도 이 과목이 정착되리라 전망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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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각 인물마다 연표와 발표논저 목록을 붙여주고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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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법률과 법학은 용어를 바르고 정확히 사용하는 것이 생명인데, 이 사전은 그런 면에서 법학도와 법률가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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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것은 한국이 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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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책상에 휴대하고 교과서에 법학자의 이름이 나오면 면면을 한 번 이 책에서 확인하면서 공부하면 법학공부의 매력을 더할 것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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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본서는 그런 글들을 모아 번역한 것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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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한국법격언으로 분류해서 수록하고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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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법학도들은 하루에 두세 개씩 법격언을 외우며 공부하면 좋은 것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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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법과 주체의식 등의 글들을 싣고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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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편집한 것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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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법학의 영역을 흥미 있게 다루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매력적인 책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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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백화점에 가면 정말 내가 왕이 된 기분이었지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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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너무나 편해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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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과거는 과거지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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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요는 일본을 배우자는 것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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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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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우리에게는 일본밖에 없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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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일본에 가기 전에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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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일본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나라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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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국가도 국민도 모두가 비정상적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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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이들 사이에 가해자와 피해자,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가 성립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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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마치 길들여진 노예나 하인처럼 이들은 기뻐하며 순종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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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힘 앞에 굴절된 약자의 잔인함은 더욱 잔혹하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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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십 년이 넘는 기자노릇을 하면서 나는 운 좋게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가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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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일본생활의 첫 인상은 지하철 안의 사람들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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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나를 빼고는 승객 모두가 눈을 감은 채 자고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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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한술 더 뜨는 사람들도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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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런 점에서 일본사회를 바라보면 참으로 묘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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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러한 기준에서 보면 전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 일본의 후진성이 사회 구석구석에 너무나도 잘 배어 있기 때문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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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런데도 당사자인 일본인들은 나비부인을 그들 스스로를 미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어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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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일본에는 수 많은 나비부인 희망자들이 흘러 넘치고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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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아예 그런 여성들의 등에 얹혀서 놀고 지내는 것은 물론 용돈에서부터 한 밑천까지 단단히 챙기는 서양남자들이 부지기수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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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내가 친하게 지내던 유럽 어느 나라의 외교관 부인이 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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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일본에만 오면 남편들이 사고가 나니까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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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일본여자들이 서양남자라면 미추노소를 가리지 않고 육탄공세를 펼쳐대니까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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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녀뿐 아니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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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서양의 남자들에게 일본은 확실히 천국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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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내가 일본에 있으면서 무엇보다 먼저 놀랐던 것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여자들의 장신구였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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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저 보통 직장의 여자사무원들이 대부분이라는데 호기심이 일어났던 것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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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멋 내는 돈을 버느라고 한 달 내내 일한 셈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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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그런 일본아가씨들의 차림새는 그들이 그토록 얽매여 있는 루이비통 백처럼 모두가 같은 스타일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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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일본의 거리에서 하루종일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아가씨들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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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귀족과 같은 품위와 자존심을 지니는 것이 바로 귀족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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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바로 이런 점이 일본여성들의 무자존심을 잘 나타내준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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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굳이 서양사회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보석을 받는 여자는 창녀밖에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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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대개 집안에서 내려온 보석이거나 결혼할 때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. |